IMF 시대가 본격적인 포문을 열던 해 대학 신입생이 됐다. 나의 하찮은 기억력은 그 시절의 몇몇 풍경을 기억한다. 가장 피부로 와닿았던 건 대학 입시다. 이전까지만 해도 그리 주목받지 못했던 지방 국립대 합격선이 상승했고, 대학마다 취업에 유리한 학과 경쟁률도 치열했다. 지금도 그러하겠지만, IMF는 <우리들의 천국> 같은 드라마에서 낭만적으로 묘사하던 대학 캠퍼스 풍경에 변화를 가져왔다. 대학은 학문을 탐구하는 지성의 공간이 아닌 졸업 이후를 대비해야 하는 공간이 되어, 학생들은 사회 비판적인 운동권 대신 장학금이나 공무원 준비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설마 했던 기업과 은행이 문을 닫던 그 시절을 세세하게 기억하지 못해도 IMF가 몰고 온 풍경은 형언할 수 없는 충격으로 깊이 각인되어 있다.

<국가부도의 날>은 1997년 IMF 사태를 복기한다. IMF 협상 당시 비공개로 운영됐던 대책팀이 있었다는 기사에 착안해 치밀한 자료 조사를 토대로 만든 영화다. <국가부도의 날>은 IMF를 둘러싼 세 줄기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국가 위기 사태를 예견한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이 이를 정부에 알리고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국가 재난적 상황을 예감하고 성공의 발판으로 삼은 사람들과 아무것도 모른 채 정부만 믿었다가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병행한다. 김혜수가 난국을 돌파하려는 경제 전문가를, 조우진이 대책팀과 시시각각 부딪히는 재정국 차관을, 유아인과 허준호가 명석한 금융맨과 피해를 입은 중소기업 사장으로 출연한다.

한 사건에서 파생되는 이야기를 정교하게 맞물리며 전개하는 <1987>과 같은 영화를 기대한다면, 다소 거칠고 감정적으로 흘러가는 <국가부도의 날>은 완성도 면에서는 아쉬움을 전한다. 영화 <빅쇼트>를 참고한듯한 윤정학(유아인) 캐릭터는 영화에서 가장 겉돌고, 대중성을 염두에 둔듯한 갑수(허준호) 캐릭터는 감정을 자극하는 신파 역할을 한다. 두 캐릭터를 통해 IMF가 불거진 시대상을 고르게 보여주긴 해도 이 영화가 갖는 날카로운 메시지와는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전개 상에서 거슬리는 캐릭터가 있음에도 <국가부도의 날>은 최근의 어떤 영화보다 선명한 여운과 흥분을 남긴다. 바로 김혜수와 조우진이 연기한 한시현과 재정국 차관의 날선 대립을 통해 IMF 시대가 갖는 의미를 정확하게 복기하기 때문이다. 김혜수와 조우진으로 대표되는 이야기로 몰고 갔어도 좋았을 만큼 두 캐릭터는 IMF 시대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는다.

그 시절 IMF는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의 구원 투수 같은 존재였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고 대부분 언론 매체를 통해 정보를 얻던 시절에 대다수의 국민들은 IMF가 때마침 손길을 내민 덕분에 국가적 재난 위기를 극복하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의 안이한 기억력은 IMF를 그렇게 기억한다. 그래서 <국가부도의 날>이 갖는 의미가 남다르다. 영화는 국민 vs 정부 혹은 기업의 입장을 대변하는 두 인물의 팽팽한 긴장 구도를 통해 사실 IMF가 만능 해결책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오히려 IMF 사태가 지금의 비정규직 같은 고용불안을 양산하고 중산층이 사라진 빈부격차 시대를 견인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암시한다.

한시현과 재정부 차관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립을 거듭하며, 영화가 품고 있는 의문과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외환 위기를 감지한 한시현은 여성이란 이유로 자신의 직책을 더욱 무시하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원칙과 소신을 앞세워 역량을 발휘한다. 외환 위기가 불거지고 이후 IMF 협상 과정에서 정부와 기업의 도덕적 해이와 무능함이 초래한 경제 재난을 국민에게 전가시키지 않고자 애쓰는데, 한시현의 올곧은 모습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좌절감을 안기는 재정부 차관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국민보다 국가의 입장을 내세우던 재정부 차관이 막후에는 자신의 야심과 대기업의 이익에 더 관심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두 캐릭터의 대결 구도가 뿜어내던 긴장감은 깊은 배신감을 불러온다. 여기에 당시 보도 자료와 도산한 기업명을 노출하며 사실적인 몰입감도 단단하게 형성한다.

두 캐릭터를 빛나게 한 배우들의 연기도 뛰어나다. 경제전문가이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는 한시현을 연기한 김혜수는 한국 영화에서 보기 드물게 감정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여성을 완성했다. 국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만큼 감정적으로 흘러가기 쉬웠을 텐데도 이성적이고 절제된 모습을 잃지 않는다. 그 이유는 어떤 상황에서든 경제전문가라는 자신의 직책에 충실하기 때문인데, 김혜수의 노련한 연기가 뜨거움과 이성이 공존하는 인물을 탁월하게 뒷받침한다. 특히 IMF 협상 테이블에서 스피칭하는 영어 연기는 김혜수란 배우가 가진 내공이 얼마나 탁월한지 입증한다.

한시현과 매번 부딪히는 경제부 차관을 연기한 조우진도 놀랍다. 이미 여러 영화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국가부도의 날>은 조우진이란 배우의 재능이 얼마나 무궁무진한지 보여준다. 영화는 권력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재정부 차관 캐릭터를 뻔하게 답습하지 않고, 조우진은 보여주는 방식을 달리한 인물을 마냥 무시할 수 없는 설득력 있는 연기로 표현한다. 재정부 차관은 짜증 날 정도로 답답함을 부르지만, 영화에서 한시현이 어느 순간 말문이 막히듯 그의 주장은 나름의 논리가 있으며, 조우진의 연기는 얄밉도록 완벽하다. 두 배우의 합이 얼마나 좋은지 IMF 발생 전후 과정을 이 두 캐릭터의 이야기로 풀어가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국가부도의 날>은 이미 제목에서 예감할 수 있듯 실패의 역사를 다룬다. 영화를 보는 동안 번번이 좌절하는 인물들처럼 답답한 마음이 무겁게 짓누른다. 결코 편하게 볼 수 없는 영화임에도 일련의 과정을 통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IMF의 진짜 모습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쉽게 간과할 수 없다. 게다가 1997년의 결정은 단순히 그 시절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으로 머물지 않고, 현재의 삶에도 여전한 영향력을 드리우고 있다. 지금의 경제 상황과 고용 현실에 의문을 갖고 있고 근원을 알기를 바란다면 <국가부도의 날>은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